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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가에게는 자신만이 가진 세계가 있다. 흔히‘작품세계 作品世界’ 라고 일컬어지는 이 세계에는 작가가 살아온 인생과 작품이 이루어진 과정, 그리고 작가만이 아는 내면의 이야기 등이 담겨있다. 예술작품을 보는 사람은 작가의 작품세계를 통해 작품을 이해하며 작가에게 다가간다. 작품세계 라는 단어는 그만큼 많이 사용되고 그런 이유로 진부하다. 특히 나이 마흔이 넘은 중견 작가의 경우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그것이 뚜렷하지 않은 경우에도 타의에 의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기도 한다. 작가 이진용도 그만의 작품 세계가 있다. 하지만 이진용의 세계 世界는 작품활동을 오랫동안 이어온 작가들의“작품세계” 라는 단어의 일반적 정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의 삶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정신과 물질의 세계 전체라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그의‘작품세계’ 는 그의‘세계 世界’ 중 일부이자 이진용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다.



이진용의 작업방법은 사물, 혹은 인물의 재현이다. 미술사의 초기부터 존재하였던 재현representation, 즉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데,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아주 가느다란 붓으로 세밀한 부분까지 묘사하는 극 사실 기법으로 캔버스를 채워간다. 그리고 그가 그리는 작품의 소재는 작가 자신이 수집해온 오래된 물건들 혹은 인류의 역사를 거쳐간 위인들이다.
 
서양에서 예술을 일컽는‘아트art’ 라는 말은 라틴어인‘아르스ars’ 에서 나왔고 아르스는 고대 그리스어인‘테크네techne’ 에서 온 것이다. 우리말로 기예 技藝라고 번역되는 테크네는 예술과 기술을 분리하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시대의 예술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고전적인 예술의 개념은 그것의 산물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산출해내는 행위, 특히 그것들을 산출해낼 수 있는 능력과 관계가 있었다. 그림 자체 보다는 화가가 가진 기술이 얼마나 뛰어나느냐가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진용의 작품은 기술적인 측면에서 그 누구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그림은 실제로 마주하고 있자면 사진과 비교해도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대상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는 실재의 재현, 대상의 모방이라는 미메시스mimesis 개념과 맞닿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이 예술의 기본적 기능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실재를 모방한다는 명제를 고수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있어 모방이란 충실한 복사의 의미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라는 의미였다. 즉 예술가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실재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진용 역시 대상을 재현하고 모방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대상, 소재를 그의 세계 世界안에서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으로써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 이진용이 그리는 대상 즉, 무엇을 표현하는 가이다. 단순한 재현을 넘어서 철저히 자신의 세계를 관통해 표현하는 소재들은 그가 수 십 년의 여행을 통해 채집한 물건들이다. 실제로 이진용의 작업실에는 타자기, 책, 시계, 가방, 축음기 등 개인작업실이지만 개인 박물관이라고 해도 무색할 정도의 엄청난 양의 소장품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이진용은 이유 없이 오래된 물건이 좋았고 그래서 이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수집은 단순한 모으기의 차원이 아닌 전문적인 지식이 동원된 성격의 것이었다. 이진용은 특히 인류의 발명품 중 가장 초기 모델, 예를 들면 최초의 카메라, 타자기, 시계 등에 대해 한없는 경이로움을 느꼈고 이들을 작품의 소재로 등장시킴으로써 인류의 발명품과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었다.
사실, 골동품을 모으는 것과 그것을 작품의 소재로 활용하는 것, 그 대상을 그리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것이다. 엄연히 물질적 대상이 존재하고 그 자체로도 충분한 가치를 갖고 있는데 이를 회화라는 예술작품의 형태로 옮겼을 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그것을 읽어야 하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골동품이란 과거의 기억을 환기시키고 현실과 잠시 동안 단절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를 평면의 이미지로 전환했을 때 그 기능과 의미는 변화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미지란 어떤 감각적 내용을 물리적 대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이미지는 그것을 표현해내는 주체의 정신적, 심리적 존재가 미리 전제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으며 하나의 이미지가 존재하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지각(知覺)을 통해야만 한다. 여기서 지각이란 인간의 감각 즉 오감 五感과 관계가 있고 특히 시각은 다른 감각에 비해 직관이 작용하며 대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원초적이다. 이진용은 그림을 그릴 때 의식적으로 계획을 세우지 않고 그 때의 상황에 맡기며 작업을 진행해 나간다. 그가 표현하는 대상은 자신의 일상에서 늘 볼 수 있는 애정을 갖고 있는 이미지들이고 결과적으로는 섬세한 묘사로 이루어지지만 그 과정은 초현실주의의 자동 기술법automatism 처럼 무의식적 직관에 의해 그려진다. 인간의 정신은 이미지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프로이트의 언급처럼, 우리의 이미지적 표현은 의식의 지배만 받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지배도 받고 있는데, 직관을 통한 작가의 심리적 정서가 반영된 이진용의 작품은 보고 그린 대상 그 자체보다 작가의 세계가 투영되어 있으며 대상 그 자체보다 많은 함의를 지니고 있다.
작가는 오래된 물건에 둘러 싸여 있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난다. 현재의 생활에서 벗어나 과거로 연결되는 일종의 통로 같은 이 소재들은 작가가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다. 작가 자신이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세계를 작품에 투영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임이 분명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진용이 선택한 대상의 재현은 그가 예술가로써 선택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그가 살아가며 보고 느끼고 있는 세계의 모습이고 이는 무수히 많은 세계의 한 면面이기 때문이다.



이진용의 작품에서 그 결과물이 나타나기까지의 과정은 작가의 세계 世界가 어떻게 작품과 만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이진용이 대상을 캔버스에 재현하기까지의 과정은 엄청난 작업량을 요구한다. 그의 작품은 현대미술에서 기술자의 손으로 넘어간 것을 작가 스스로 감당함으로써 그 수공의 힘을 의미 있게 보여주고 있는데, 세필의 작은 붓 터치로 채워진 거대한 캔버스는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과 동시에 예술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사유하게 한다.
그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진용은 우연한 기회에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고, 중학교 이학년 때부터“세상에서 제일 잘 그리겠다” 는 일념 하에 노력하였다. 그 노력은 열다섯 살 소년이 하기에는 지독할 정도로 철저했는데, 그는 미술사에 남아있는 거장의 작품들을 수없이 보고 외우면서 그리며 자신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너무나 잘 그렸기에 경쟁할 사람도, 비교할 대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뒀다가 필요할 때에 꺼내 쓰기로 마음 먹었고 한동안 그림이 아닌 다른 매체의 작품으로 작가로서의 경력을 하나하나 쌓아나갔다. 그리고 이번 아라리오에서의 개인전은 작가가 스물 두 살 이래로 그리지 않았던‘회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잘 그렸고 그러함에도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는 묵묵히 자신의 몸을 움직이며 쉼 없이 작업을 이어나갔고 인내와 끈기로 한 점 한 점 작업을 완성시켜 나갔다. 그의 엄청난 노동력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천 여 개의 서랍으로 구성되어 있는“내 서랍 속의 자연(2007-2008)” 이라는 대형 작품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책장을 장식하는 책들은 자신이 영향을 받은 위인들 혹은 영향을 받은 책이며 각각의 서랍을 열면 위인들, 책과 관련 있는 텍스트와 이미지 혹은 물건들이 레진에 담겨 화석화 되어 있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노동력이란 상상하기가 어렵고 소요된 물리적인 시간만 하더라도 한 작품을 위해 작업한 시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인데, 작품의 규모뿐만 아니라 각각의 서랍의 이미지는 그 섬세함만으로도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이 작품은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작업하는 끈기로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진용의 작업은 대상의 재현과 힘든 노동의 결과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예술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그의 작업은 현재를 원시로 맞바꾼, 그 누구도 손으로 할 수 없는, 작가 자신이‘훈련된 자만이 갖는 선물’ 이라고 말하는 가치를 담보하고 있는 것이다. 커다란 캔버스에 지루할 만도 한 반복 작업을 지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던 원천은 막연한 설레임과 그리움이다. 과거로 돌아가 미켈란젤로와 대화하고, 마르셀 뒤샹, 클림트 등 수많은 위인들과 그들이 작가 자신에게 준 영향에 대해 토론하고 질문하며 대상에 대한 애정을 발산하는데 이 에너지가 그의 고된 작업을 감내하게 하는 원천이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작업강도와 극 사실이라는 기법이 요구하는 긴 작업시간으로 시력은 나빠지고 최소의 수면시간으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릴 수 있으면서도 작업을 할 때 그의 몸은 마치 시계처럼 여러 요소가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대상에 대한 설레임으로 인해 실제보다 육체적인 피곤이 덜하여지는 것이다. 극 노동에 가까운 작업을 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소는 그의 일 중독적인 성격도 있지만 그리는 대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더불어 끊임없는 마인드 컨트롤이다. 작가가 이야기 하듯‘지구력은 의지로 획득하는 것이 아닌 내공의 결과’ 이며 그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10대 소년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내공을 키워왔다. 이진용은 이를 위해 정신과 마음을 공허하게 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고 자신을 작가로써 살아가기에 충분하도록 몸과 마음을 훈련시켜왔다. 고된 노동과 그것을 기꺼이 할 수 있도록 만든 수 십 년 간의 훈련은 현대 미술에서 상실된 미술의 오래된 가치를 발견하게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작업을 위해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한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포장되지 않은 미술이 가진 본래의 가치 그리고 순수 정신일 것이다.
 


이제 이 모든 것은 하나로 모아진다. 재현이라는 과거의 작업방법, 그리고 오래된 물건들, 직업 노동자에 가까운 작업강도, 훈련된 정신력 등은 이진용의 작품에서 만나게 된다. 6미터의 캔버스에 그린 큰 여행가방은 단순히 가방을 그린 것에서 머무르지 않으며 몇 백 년의 역사를 지닌 가방이 가진 세월의 무게, 그리고 과거의 시간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가방이 거쳐간 이야기들, 대상에 대한 애정, 그것을 세필로 그린 작가의 노동력, 훈련된 끈기와 인내심이 담겨있다. 그렇기에 이진용의 작품은 단순히 작품 그 표면 자체로 드러난 표현력을 넘어 그 이면에 새겨져 있는 정신과 더불어 이해해야 한다.
오랜 시간 동안 훈련된 작품을 향한 의지, 그리고 삶의 철학, 그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무한한 애정의 대상인 작품의 소재, 이들 모두의 결과물인 작품은 그의 삶이자 그가 존재하는 세계이다. 작가로써의 삶에 철저하게 초점이 맞춰진 이진용의 일상 그리고 이를 통해 생성된 작품은 그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며 이를 통해 세계의 한 면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미술이란 결국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이 물질로 드러나게 된다. 회화나 조각은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또한 소유할 수 있다. 과거의 이론가들은 예술을 정신과 형식의 이분법으로 나누어 그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였고 정신이 결여된 작품은 진정한 예술이라고 믿지 않았다. 이진용이 작품을 만드는 행위, 그리고 작가가 선택하는 소재, 작업을 이어나가는 놀라운 정신력 등은 미술이 결국‘물질’ 에 불과하고 그것이 물질이기에 지닐 수 밖에 없는 가벼움을 전복시키고야 만다. 이진용의 작품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지만 그것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은 현대의 미술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세계는 단순한‘작품세계’ 를 넘어서는 것이며 그의 정신과 육체를 아우르는 세계 전체일 것이다.

최지아 / 아라리오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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